아침에 일어나 보니 전날 밤에 이야기를 나눴던 프랑스인이랑 대만인은 일어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인사 정도는 하고 나오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했다. 원래는 이 날 점심에 고모를 만나기로 했었는데 일정이 바껴서 고모하고는 저녁에 도톤보리에서 보고 그 전까지는 교토를 더 둘러보기로 했다.
3일차가 이번 여행 중 가장 맑은 날이었던 것 같다. 키타오지역까지 걸어간 다음 버스를 타고 기요미즈데라로 갔다. 버스가 번화가를 지나가서 그런지 중간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 바람에 일행을 놓쳤는데 어찌어찌 와이파이를 잡아서 연락이 닿았다. 포켓 와이파이가 다른 건 다 좋은데 일행을 놓치면 연락 수단이 끊겨버린다는 게 문제다. 아무튼 버스에서 내려서 10분 정도 고지대로 걸어 올라가자 기요미즈데라가 보였다.
전형적인 교토 거리의 풍경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저 멀리 기요미즈데라가 보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기요미즈데라로 들어갈 수 있다.
앞에 보이는 게 인왕문, 오른쪽에 잘 안보이지만 삼층탑이 서있다.
인왕문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던 돌이다. 옆에 서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메이지 시대에 근대적 측량법을 도입해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쓰였던 측지점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고지대에 있다보니 기준점으로 쓰기 좋았던 모양이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바로는 굳이 안에 안 들어가도 주변 구경을 하는 데는 문제없다고 했는데, 막상 와보니 입장료 내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풍경을 제대로 보기는 힘들었다. 산책을 조금 하다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봤다. 안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특히 기모노를 입고 셀카를 찍는 여자들이 정말 많았다. 그 중에 몇 명은 한국어를 쓰던데 아마 주변에 기모노 렌탈샵 같은게 있는 모양이다.
100엔짜리 오미쿠지. 대길(大吉) 나왔다.
이것 말고도 불교 사찰치고는 미신적인 요소들이 정말 많았다. 특히 사찰 안에 지주신사(地主神社)라는 이름의 신사가 같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거리가 떨어져 있는 건 아니고 바로 옆에 붙어있다. 불교 사찰이랑 신사가 같이 있다니 조합이 좀 기묘했다.
지주신사에서 발견한 애정운을 체크하는 바위(?). 10m 정도 간격으로 같은 모양의 바위가 2개 있는데, 눈을 감고 한 바위에서 다른 바위까지 정확히 걸어 도착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것도 지주신사에 있던 건데, 굳이 해석하자면 '쓰다듬는 다이코쿠 씨'정도 될 것 같다. 뭔가 소원이 있을 때 그 소원하고 관계된 몸 부위(?)를 쓰다듬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예컨대 여행 안전을 바란다면 발을, 돈을 벌고 싶다면 보따리를 쓰다듬으면 된다.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괜히 옆에 돈을 집어넣는 함을 배치한 걸로 보면 돈을 넣어야 더 효험이 있다는 걸까. 1엔짜리 넣으면 더 벌받을 것 같아서 그냥 안넣고 머리만 몇 번 쓰다듬다가 내려왔다.
이것저것 둘러보고 나서 길을 계속 따라가니 교토 시내랑 기요미즈데라 전경이 보였다.
구글에 기요미즈데라로 검색하면 거의 대부분 이 각도로 찍힌 사진이 나온다.
위 사진하고 같은 곳에서 바라본 교토 시내의 모습. 교토 타워를 제외하면 높은 건물이 거의 없다. 이 동네는 땅값이 싼 편인 건지, 아니면 과거 제주도처럼 높이 제한이 있어서 그런건진 모르겠지만 그런 경관이 교토스러운 이미지에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기요미즈데라 밑쪽을 통해서 빠져나가기 때문에 아래서 올려다볼 수 있다. 규모는 거대한 건 좋은데 나무 지지대들이 뭔가 좀 위태로워 보였다.
기요미즈데라를 다 둘러보고 하나미코지도리(花見小路通)를 찾아갔다. 올라올 땐 절에서 남쪽 방향으로 나있는 옆쪽 길을 통해 왔는데 나갈 땐 정문에서 바로 앞 정면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가다가 옆쪽으로 분위기 좋은 상점가가 있길래 그 길을 따라 가봤는데,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이 상점가 자체도 관광지라고 한다. 이름은 산넨자카, 니넨자카라고 불린다.
대만 지우펀에서 길을 헤매다가 발견한 계단길이 떠올랐다. 이런 곳은 세로로 찍어야 진짜 이쁜데 세로 사진은 블로그엔 올리기 힘들다.
교토스러운 거리 풍경을 즐기면서 걷다가 하나미코지도리에 도착했다. 골목길이 많아서 지도가 없으면 찾아가기는 힘들 것 같다.
여기가 하나미코지도리.
저녁엔 게이샤들이 오가는 고급 유흥가가 된다지만 낮에 방문했을 땐 딱히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고, 산넨자카, 니넨자카랑 분위기는 거의 비슷했다. 게이샤를 보려면 그들이 출근하는 시간대인 저녁에 와야 한다고 한다. 길 자체는 짧아서 조금 둘러보니 금방 끝났다. 인터넷에서 조사했을 땐 점심 식사는 그래도 저렴하게 파는 편이라고 해서 여기서 점심을 먹을까 했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저렴하기는 무슨... 전날 먹은 규카츠 급의 맛을 보장한다면 몰라도 도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나미코지도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오사카행 전철이 출발하는 한큐 가와라마치역이 있다. 역 근처에서 라멘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부탁받은 캘린더 굿즈를 여기서 사기로 했다. 겸사겸사 같이 여행한 친구도 지인한테 부탁받은 'manga bible'이라는 책을 사러 가와라마치역 근처를 둘러봤다.
가와라마치역은 주변은 우리가 교토에서 방문한 곳들 중에선 교토역 다음가는 번화가였다. 식당도 많고 대규모 쇼핑거리도 조성되어 있어서 볼 게 많았다. 어차피 오사카로 일찍 가봤자 시간도 많이 남을 것 같아서, 서점을 찾는 김에 거리 구경도 좀 했다.
내가 부탁받은 캘린더는 멜론북스에서 직원한테 부탁하니 바로 찾아줬다. 하지만 그 망가 바이블인가 하는 책은 어떤 서점을 가봐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책들이 있을 만한 가게들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긴 토라노아나 교토점. 들른김에 열차에서 시간도 때울 겸 요츠바랑 13권을 하나 샀다. 환율을 고려해도 한국보다는 비쌌다.
거리를 모두 둘러본 다음 가와라마치역에서 오사카행 열차를 탔다. 가와라마치역에서 출발하는 한큐 전철과 사카이스지선은 직결 운행을 하기 때문에 숙소가 있는 동물원앞역까지 바로 갈 수 있다. 다만 모든 열차가 가는건 아닌지 중간에 한차례 환승을 하긴 했다. 그래도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승강장에 타면 돼서 환승 시간은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동물원앞역에 내려서 숙소에 체크인한 다음 도톤보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이 2~3시간 이상 남아있었기 때문에 신세카이의 메가 돈키호테, 덴덴타운, 구로몬 시장을 전부 구경했다.
덴덴타운에 온 김에 일행이 부탁받은 건프라를 찾으러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했다. 위에 건 하비샵에서 본 아이언맨 피규어.
이건 바닥하고 위에 올릴 블록을 사서 조립해서 만드는 도시 모형. 이거도 제대로 할려면 돈이 많이 깨질 것 같다. 진열된 도시 정도로 만들려면 최소 1만엔 이상 깨진다. 하지만 철도 모형에 비하면 차라리 저렴한 축에 속한다.
이쪽은 나노블록 코너.
건프라 코너는 여기저기 엄청 많았지만 찾는 물건은 이 가게엔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 건프라는 나중에 돈키호테에서 구입했다. 아무튼 덕분에 이것저것 구경은 실컷 했다.
덴덴타운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닛폰바시역이 있고,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가면 구로몬 시장이 있다. '오사카의 부엌'이라 불릴 정도로 대표적인 식료품 시장이라 하는데, 저녁 먹기 직전이어서 둘러보기만 하고 따로 뭘 사지는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된 거지만 오사카에서 초밥을 싸고 신선하게 즐기려면 여기서 산 다음 숙소에 가져가서 먹는게 제일 낫다고 한다.
구로몬 시장을 지나서 조금만 더 걸어가니 도톤보리 거리가 나왔다.
도톤보리 강에는 계속 저 유람선이 다닌다. 저 유람선도 오사카 주유패스가 있으면 추가요금 없이 이용가능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4일차 하루 동안만 주유패스를 쓰기로 했기 때문에 이 유람선을 따로 타지는 않았다. 사실 유람선을 타는 것보다 강을 걸으면서 유람선에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편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앞에 보이는 대관람차가 도톤보리의 랜드마크인 돈키호테 건물. 막상 가보니 건물이 여러 층이긴 해도 층마다 공간이 좁아서 오히려 신세카이의 메가 돈키호테가 볼 거리랑 살 거리는 더 많은 것 같다. 일단 공간이 좁으니 동선 자체가 조금 불편했다.
주변을 구경하다가 고모를 만나서 'がんこ'라는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고모도 오사카에 살면서 도톤보리에 올 일은 거의 없다는 것 같다. 나도 서울 살면서 명동 가본건 해봤자 5~6번 정도니 비슷한 느낌일려나.
초밥이 양이 좀 적은 것 같아서 타코야끼도 먹었다. 이 주변에는 타코야끼 가게가 정말 많았다.
도톤보리의 상징인 글리코맨? 사실 이건 진짜 글리코맨은 아니고 작은 글리코맨. 사람 키랑 비슷했다.
이게 진짜 글리코맨이다.
고모부께서 도톤보리까지 고모를 데리러 오셨다. 잠깐 인사를 하고 우리는 신사이바시를 구경하러 갔다. 글리코맨을 볼 수 있는 저 다리에서 남쪽의 글리코맨이 있는 방향으로 가면 에비스바시 거리가 있고, 반대편 북쪽으로 가면 바로 신사이바시 입구가 보인다.
이쪽은 에비스바시.
이게 신사이바시의 모습. 도톤보리도 그렇고 성수기의 명동만큼이나 사람으로 가득했다.
이 가게 아무리 봐도 설빙같은데...
지금 검색해보니 '설빙'이라는 언급은 따로 없지만 '떡볶이'를 판다던지 '일본 상륙!'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로 봐서는 설빙이 일본에 진출하면서 이름을 바꾼 것 같긴 하다.
걷다가 발이 조금 아파와서 잠시 쉴 겸 길 옆에 있던 카페에서 파르페를 하나씩 사 먹었다.
신사이바시를 모두 돌아보고 다시 숙소까지 걸어갔다. 일행들은 다시 건프라를 조금 찾아보고, 나는 타이토 스테이션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근데 저녁 8~9시가 가까이 되니까 대부분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고 하길래 같이 게임을 몇 판정도 했다.
요즘 반응 좋다는 츄니즘도 해봤다. 재밌긴 한데 자세가 조금 민망했다.
마지막으로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야식도 살 겸 그 건프라도 찾을 겸 돈키호테를 다시 방문했다. 한국에 가져갈 것들을 사려다가, 한번에 5천엔 이상을 결제했을 때 면세혜택이 있다고 하길래 난 그냥 마지막 날 저녁에 한꺼번에 사기로 했다. 그냥 돌아다니면서 다음 날 뭘 살지 찾아봤다.
駄菓子를 번역해서 막과자라고 써놨다. 한국에서 '막과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땐 駄菓子를 옮길 단어가 따로 없어서 억지로 쓰는 단어인가 했더니 진짜로 쓰는 말인 모양이다. 사실 불량식품이나 저질과자라고 번역하는 것도 좀 그렇고, 차라리 영어의 Cheap candy처럼 저가 과자라고 번역하는 건 어떨까 싶지만 그렇게 치면 700원짜리 봉지과자들도 전부 같은 분류로 묶여버리니 이것도 좀 애매하긴 하다.
오후의 홍차 1.5L 세금까지 합쳐서 1500원이 안 된다. 한국에서는 500ml가 3000원 하던데...
아무튼 돈키호테에서 야식하고 15도짜리 모히또만 사서 쉬었다. 이번 숙소는 한 방 1인실인데 가격은 1박 1600엔밖에 안해서 맘에 들었다.